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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거울이 있다[백윤경의 세상 읽기]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외롭니?”

마법의 거울에게 묻는다면,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이제는 쇼핑몰에서도 대화창을 열고 수시로 정보를 알려온다. 물론 그들은 내가 회원가입을 할 때나 물건을 주문할 때 정보수신에 동의했음을 확인시키며 딴죽 걸지 말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 나는 동의했다. 할인쿠폰 제공과 비회원주문시의 불이익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내밀며 선택을 하라기에, 사소한 이익에도 냉큼 동의했다. 매번 그 당근이 ‘10만 원 이상의 주문’과, ‘일 주일 이내의 사용’이라는 함정을 품고 있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다보니 스마트폰은 줏대 없는 주인 탓에 자주 흔들린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뒤로는 온갖 종류의 단체로부터 단톡방과 밴드에 초대되고, 쉴 새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알림’이 온다. 누군가 새벽시간에는 숙면에 방해가 되니 글이나 사진을 올리지 말자는 제안을 하자, 새벽에도 소통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알림’을 무음으로 설정하라는 댓글이 올라온다.

진즉에 모든 밴드와 단톡방은 무음으로 해 놓는 사람이 많다. 초대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서 방을 나오거나 탈퇴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이게 애물단지다.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하고, 뭔가 중요한 정보를 놓칠 것 같은 강박도 생기고, 그렇다고 일일이 읽자니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 그래도 지우지 못하고 미뤄두고 있는 것은 그 역시 하나의 ‘섬’이 되고 있어서는 아닐까? 정현종 시인은 ‘섬’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의 <섬>에서

그 섬은 가고 싶지만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다. 세상엔 그토록 많은 커뮤니티가 있고, 우리는 셀 수 없는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막상 직접 만나는 횟수는 줄어든다. 통신망 속의 간접만남으로 인해 갈증이 적어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 또한 개인적으로 매우 그렇다고 인정한다.

문자로든 통화로든 ‘한번 만나자’는 말로 마칠 때가 많지만 구체적인 약속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어졌다. 언제든 스마트폰을 열기만 하면 원하는 상대와 접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여유를 부리게 만든다. 강화 유리로 만든 액정과 유리 광섬유 케이블은 천망(天網) 못지않게 촘촘히 이 세상을 연결해놓았지만, 연결된 사람들의 직접적인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유리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식탁에서도 각자 스마트폰 속에 만들어놓은 자신의 세상에 빠져 고개를 들지 않는다는 흔한 불평은 요즘 세태를 반영한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없기에 반영할 도구를 찾아왔다. 물에 비친 모습에서 청동거울을 지나 대중적인 가격의 거울이 나오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했지만, 이젠 순식간에 진화하는 스마트폰의 카메라와 다양한 거울 앱을 통해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을 볼 수 있다. 일본의 발명가가 만들었다는 ‘정영경(正映鏡)’같이,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 앱도 나와 있다. 우리가 거울을 통해 보는 상처럼 전후가 바뀌지 않은, 타인의 관점에서 보이는 이미지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양한 도구에 활용되기도 하고, 자기성찰의 상징이기도 한 거울이지만,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는 불통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은 수심경(水心鏡)이라는 거울을 궁중에 걸어두고 보배로 삼았으면서도 옛일을 거울삼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외관을 가꾸는 데만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거울은 자칫 겉모습만을 보게 한다는 본보기가 되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하지만 은판을 떼어내면 거울은 유리가 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소통의 가능성을 갖는다. 액정 속의 세상, 통신망 속의 세상 역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거울에 쓴 편지>로 순식간에 많은 사람을 감동으로 물들인 아테나 오차드라 영국 소녀의 사례가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운동 중에서도 특히 복싱을 좋아했던 발랄한 12살의 소녀가 갑자기 쓰러졌고, 골종양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7시간이나 걸리는 척추 수술을 견디고, 여러 차례의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치료는 성공하지 못했다. 아테나는 기력이 없어 침대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우는 엄마를 위로할 정도로 의연했다고 한다.

2014년 소녀가 세상을 떠난 후 방을 정리하던 아버지가 우연히 거울을 떼어냈을 때, 뒷면에 적힌 3000자 정도의 글을 발견했다. 평소에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소녀가 왜 힘들게 거울 뒷면에 이 글을 썼는지 알지 못한다. 나날이 변해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오히려 성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실보다는 상상을 통해 더 심오해진다. 아무튼 그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름을 기억해주세요.
제가 겪었던 아픔보다 제가 해왔던 일을 기억해주세요.
사랑은 유리처럼 너무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깨지기 쉬운 것이에요.
사랑은 흔하지 않고, 삶은 낯설죠. 영원한 것은 없고 사람들도 변해요.
삶은 모두에게 게임과도 같고, 그 게임이 주는 유일한 상은 사랑일지도 몰라요.
누군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사랑을 그냥 흘려보내지 마세요.
삶은 기쁨과 슬픔의 연속이고 슬픔이 없다면 기쁨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열어줄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사랑은 함께 살아갈 사람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을 사람과 나누는 거예요.
울지 마세요. 당신이 늘 내 곁에 있을 거라는 걸 알아요. 

 - 아테나 오차드의 <거울에 쓴 편지>에서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너무 일찍 떠나간 소녀를 애도하며, 소녀의 글에 감동했고 SNS로 다른 이들에게 전달했다. 위대한 문장가의 빼어난 글보다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감동을 더한 것은 실존했던 소녀와 그 이야기의 진솔함이며, 공감을 통한 시너지였을 것이다.

다른 이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는 능력을 학자들은 ‘거울신경세포’로 설명한다. 인간이 다른 대상의 행동을 관찰하는 동안에도 자신이 행동하는 것처럼 뇌에서 활성화하는 영역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위에 이상이 있지 않은 한 같은 느낌을 받고, 같이 아파하거나 기뻐하고 모방하기도 한다.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보상을 받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통이나 공감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은 독감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전염된다.

“거울아, 거울아 정말로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외롭니?”

마법의 거울에게 다시 묻는다면, “스마트폰만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답을 하지 않을까?

어려운 시대를 힘겹게 건너온 한 작가가, 외롭게 버티던 세상을 스스로 등졌다는 뉴스가 뜬다. 잘못된 기사라고 본인은 부인했지만, 그의 영안실에서 자해를 기도한 이가 있었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먼 나라 소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울리지 않는 스마트폰을 가진 또 다른 사람이 내 곁에서 스러져가고 있는 건 아닐까? 다음 베르테르가 비관을 끝내기로 작정하는 건 아닐까? 어두운 거울 하나를 마주친 듯 섬뜩해진다.

백윤경  imbue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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