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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거는 시간[백윤경의 세상읽기]

스노글로브를 흔든다. 물이 채워진 유리구슬 안에서 흰 눈이 흩날린다. 오두막집과 눈사람, 나무들이 눈발 속으로 가라앉는다. 화창하거나 무더운 날에도 눈이 내리게 하는 마법의 유리구슬 덕에 아무 때나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을 만들 수 있다.

렌즈처럼 눈 가까이 대면 그 너머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이고, 어떤 방향이든 황홀하고 따뜻한 곳이 된다. 아무리 험한 장면도 눈 오는 풍경으로 포장할 수 있다. 인간으로 사는 고단함에는 가끔 그런 달콤한 위로나 속임수가 필요하다.

스노글로브는 추억을 환기시키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신기한 재주 덕에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시민 케인’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스노글로브는 ‘시민 케인 스노글로브’라는 이름을 달고 여전히 팔린다. 케인의 죽음을 보여주는 첫 시퀀스에서 이 스노글로브는 매우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이 걸린 철조망에서 시작된다. 높은 철조망 너머, 케인이 은둔중인 거대한 저택은 기괴하고 암울해 보인다. 빛이 강할수록 어둠도 짙어진다 했던가? 흑백영화의 장점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크고 호화로울수록 그늘이 드리워지면 그만큼 흉물스러워지니 말이다.

계속 카메라 렌즈를 따라 가면 바벨탑과도 같은 대저택의 불이 꺼졌다 켜지고, 눈 내리는 풍경 속의 지붕이 보인다. 좀 더 가까이 가 보면 스노글로브 안의 모형집 지붕이다. ‘로즈버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지는 케인의 손에서 굴러 떨어진 스노글로브가 깨지고, 그 둥근 유리조각을 통해 방으로 급히 들어서는 간호사의 모습이 보인다. 케인의 두 손을 가슴에 모아주고 시트로 얼굴을 덮어주는 것도 간호사다.

케인은 세속적인 영욕을 고루 맛본 사람이다. 세계적인 부호가 되고, 대통령의 조카와 가정도 이루었지만 여배우와의 스캔들 때문에 정계진출의 꿈이 좌절되고 가족을 잃는 뼈아픈 경험도 한다. 젊은 시절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행하던 그는 돈이 많아질수록 초심을 잃고 권력 지향적이며 난폭해지기까지 한다. 그는 결국 ‘부유한 독거노인’으로, 경주마처럼 질주하던 삶을 마감한다.

경주마를 경주에 내보낼 때, ‘차안대’와 ‘귀 가면’, 그리고 ‘얼굴 가면’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말의 눈은 옆에 달려있고, 구조상 시야가 넓지만 약간의 보이지 않는 지점 때문에 뒤에서 함부로 다가갔다가는 불안을 느낀 말에게 차이기 십상이라고 한다.

또한 말은 귀와 눈이 예민해서 관중들의 반응에 대해 공포감과 불안을 느낄 수도 있어 주변의 시야와 소리를 차단해주는 것이 안전하고, 경주에 대한 집중력을 높여 속도를 내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얼굴에 모래가 튀는 것에 예민한 경주마는 얼굴 가면도 씌운단다. 말을 위한 조치처럼 이야기하지만 철저히 마주의 관점에서, 경주만을 위해 취하는 행위가 아닐까?

지인의 회사 오너는 사원들에게 종종 ‘차안대’와 ‘귀 가면’을 예로 들면서 집중력과 효율을 강조한다고 했다.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지향적인 본성을 가진 것이 기업의 생리겠지만, 야성을 차단당한 말들은 이 경주가 즐거울까? 달리기 위해 태어난 말일지라도, 그런 유형의 경주는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라 결코 신나지 않을 것이다.

개미는 가장 부지런한 동물로 손꼽히지만 실은 80%의 시간을 빈둥거리고 있다 한다. 효율을 생각해서 빈둥거리지 못하게 하면 길을 찾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래지향적인 조직, 창의성과 집단지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좀 더 유연함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연간 근로시간은 2000년 2512시간에서 2016년 2069시간으로 줄었지만 OECD 평균 보다 300시간 이상이 많고, OECD 회원국 중 중하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한다. 목표를 향해 일제히 달려가다 잃어버린 많은 것, 특히 자신을 좀 더 들여다보아야 할 때가 왔다. 눈가리개를 떼고 빈둥거리지 않으면 최악의 행복지수와 자살률을 벗어나기 어렵다.

기자인 톰슨은 케인의 유언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생전에 그와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다니지만 끝내 밝히지 못한다. 노동자들의 입장을 지지하여 권력자들을 고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젊은 시절 케인의 혈기와, 그가 이룬 성공들, 정치에 뜻을 두면서 점점 변해가는 과정을 확인했을 뿐이다. 영화의 막바지에 가서야 비밀은 밝혀진다.

애초에 케인은 자신이 있고 싶은 곳, 눈 내리는 마당에서 강제로 끌려나왔다. 하숙인으로부터 하숙비 대신 받은 광산채굴권이 그야말로 ‘노다지’가 되자 자식을 성공시키고 싶었던 부모는 그 돈을 이용해 케인을 도시의 위탁가정으로 보내려한다.

자신을 데려가려고 온 대처가 그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창문을 통해 눈이 내리는 마당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케인이 보인다. 그의 곁에 썰매가 있다. 그가 죽어가면서 외친 마지막 말, ‘로즈버드’는 썰매의 이름이고, 그가 죽고 나서 불태워지는 잡동사니 꼭대기에 오르고서야 그 밑바닥에 쓰인 ‘로즈버드’라는 글자가 드러난다.

‘장미꽃봉오리’라는 원래 의미가 그의 최후의 모습과 대비되며 그가 꿈꾸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삶에서 잃어버린 퍼즐조각, 영화 대사대로 ‘그가 갖지 못했거나 잃어버린 것’이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부와 명성, 아첨꾼들과 미인도 그가 최후의 순간을 함께하고픈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로즈버드’와 스노글로브를 놓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한 조각이 그의 전부는 결코 아니다. ‘로즈버드’의 의미를 쫓던 톰슨 기자는 ‘그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고, 또 그걸 잃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케인은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살아있는 동안에 갖지 못한 한 조각이 있었고, 그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조각이다. 인간의 삶 전체를 그 한 조각이 결정할 수도 있다.

밤을 꼬박 새며 일을 하고 나니 아침 열시하고도 오십삼 분, 머리는 더 맑아져있다. 마라톤 선수들이 극한의 고통을 느끼는 ‘사점(死點)’을 넘어서면, 희열을 느끼는 순간인 ‘러너스 하이’가 온다고 한다. 그걸 가능케 하는 호르몬, 엔도르핀이 분비중인 모양이다.

지금 스노글로브는 필요 없다. 지난밤에는 하늘이 온통 거대한 스노글로브가 되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원하는 것일 때, 그 어떤 힘든 일도 빈둥거림만큼 즐겁다. 하나의 퍼즐조각을 찾은 이런 날엔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에서 열리는 다른 공간에도 별이 뜬다. 완성이라는 욕심만 버리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마법이 시작될 것 같은 날이다.

백윤경  imbue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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