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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대하는 몇 가지 자세[백윤경의 세상읽기]

 ‘사과로 사과하세요.’

10월 24일 ‘애플 데이’는 ‘사과의 날’이라는데, 날도 잡아주고 캐치 프레이즈도 내걸고 멍석도 깔아주었는데, 그러나 사과는 쉽지가 않다. 사과를 받는 것마저도 간단치 않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미적거리다가 그 날이 후딱 지나가버렸다. 딱히 사과까지 주고받을 일은 아니라 해도, 이참에 풀어버리자고 지어먹었던 마음은 기회를 놓쳤다.

‘애플 데이’는, ‘발렌타인 데이’나 ‘화이트 데이’의 상업적 유전자를 물려받아 우후죽순 생겨난 여러 ‘데이’들과 태생이 좀 다르다. 2000년 학교폭력예방센터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통한 화해’를 목적으로 지정한 날이다. 올해에도 여러 학교에서 행사가 열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발렌타인 데이’가 상업적 전략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비판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직설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초콜릿 몇 개나 사과 한 알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름대로 좋은 일이다. 물론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다. 인간관계는 가장 사소한 것이 결정하기도 한다.

‘사소한’이란 ‘보잘것없이 작거나 적다’는 의미이지, 중요도를 뜻하지는 않는다. ‘사소한 말다툼 끝에’, 또는 ‘특별한 이유 없이’로 시작하는 범죄가 잦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사소한’것의 범위와 위력에 대해 새삼 놀란다. 어이없는 이유로 갈등이 생기고,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곤 하니 말이다.

‘갈등’은 칡을 뜻하는 '갈(葛)'과 등나무의 '등(藤)'이 얽힌 것으로, 서로 복잡하게 뒤얽혀 화합하지 못함을 비유한다. 칡은 오른쪽감기를 하고 등나무는 왼쪽감기를 하는 식물이라니 그들이 얽히면 답이 없겠는데, 인간의 마음은 일정한 방향조차 없지 않은가.

쇠사슬로 묶어놓은 코끼리가 체념을 하기 시작하면, 쇠사슬을 풀고 발목에 가느다란 끈만 묶어두어도 도망가지 못하여 통제가 가능해진다고 한다. 사소하지만 한없이 스스로를 속박하는 그 무엇! 우리의 감정은 개인적으로 특별히 민감한 부위를 갖고 있다. 사과 한 알에 끝없는 관용을 베풀 수도 있고, 천만금을 받는다 해도 용서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맹자는 이루(離婁 下篇)에서 말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항상 그를 사랑하고 남을 공경하는 사람은 남도 항상 그를 공경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도리에 어긋나게 대할 경우 군자는 반드시 자신을 돌아보아 '내가 분명 인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분명 예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왜 이 사람이 이러겠는가'라고 반성한다.

군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사과를 주고받을 때 우리는 분명 자신의 수준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문제를 발견하려 애쓴다. 그러나 때론 너무 부족한 사람이어서, 혹은 민감한 지점이나 정도가 달라서 서로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을 때가 있다.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빈만찬에 위안부 할머니가 초대되었다고 한다. 보상금보다는 한 마디의 진정한 사과만 있으면 된다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는데, 할머니들은 이제 몇 분 남지 않았다. 시간마저 기울어진 운동장의 끝에서 막막한 겨울을 맞고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한국에 왔을 때 ‘나눔의 집’을 방문하며, “독일은 전쟁범죄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국제적으로 분명히 보여줬는데, 일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는 2004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시민 봉기 60주년 기념식장에서 “폴란드를 점령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데 대해 우리는 다시 진심으로 머리를 숙인다”고 사죄하고, 바르샤바 인들의 봉기는 ‘폴란드의 존엄’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바르샤바 희생자 추모비는 1970년 12월 7일,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던 곳이기도 하다. 독일 현직 총리가 피해 국가에서 과거사에 대한 용서를 구한 것이다. 바르샤바 조약 체결을 위해 폴란드를 찾은 그에게 냉담했던 폴란드인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바꿔놓은 것은 물론이고, 세계인의 신뢰와 마음을 얻은 역사적 장면이었다. 조약은 순조롭게 체결되었고, 이듬해 빌리 브란트 총리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무릎을 꿇은 건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세상은 평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인 뉴욕의 멀리지에이트 교회는 400년 전, 네덜란드 이민에 의해서 자행된 만행에 대해 인디안의 레나페 족에게 공식 사과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 인디언은 “무려 400 년이 지나서 가해자의 후손들이 단지 ‘그 때 미안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사과를 받는 피해자의 후손 쪽에서는 당장 ‘정말 이제야 그런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행사를 여는 데는 가해자 쪽도 피해자 쪽도 특별한 용기가 더 필요했고, 쉽지 않은 행사였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그 마음만큼은 받아주어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늦었다하더라도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용기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들은 왜 용기를 냈을까? 자신들의 어두운 역사가 재조명 되는 위험을 무릅쓴 용기가 자기 자신을 성숙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은 아닐까? 아프고 시려도 알을 깨고 나와야 다음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사과의 전제조건은 미안하다는 감정이나 표현보다는, 철저한 자기성찰이다.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어떤 식의 힘도 쓰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 진심에 이를 것이고,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다. 학교폭력예방센터에서 힘의 우위에 있는 가해자들에게 사과를 하도록 만든 것도 힘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르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언어든, 돈이든, 무기든, 권력이든, 힘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만능인 것도 아니다.

몇 년전 소백산 죽령옛길에서 만난 사과농장 할머니가 사과를 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우선, 한 손으로 가만히 밑동을 받쳐 든다. 그리고 그에게 시간을 좀 준다. 누군들, 또는 무엇인들, 이 순간이 쉬운 일이겠는가?

하나의 생명으로 이 세계를 드나드는 경이로움을, 지난했던 과정과 존재의 무게를 마지막으로 누리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거나, 가지에서 수직방향으로 넌지시 밀면, 때가 되었음을 안다는 듯 순순히 가지를 뜬다.

사과에게 완력은 필요치 않다. 무식하게도 힘을 주어 당기며 사과와 씨름하는 나에게 할머니가 은밀히 알려준, ‘하늘을 향해’ 또는 ‘수직으로’에는 이런 은유가 담겨있다.

‘사과를 받기 위해, 나는 사과와 같은 자세여야 한다.’

백윤경  imbue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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