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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놓치다[백윤경의 세상 읽기]
봄날의 시흥갯골공원

저만치 앞에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무단횡단금지 펜스 옆, 승합차 아래 엎드려있는 남자 곁에는 검은 비닐봉지에서 쏟아진 과일이 흩어져있다. 살아있을 때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로 모양이 잡혀있던 관절들은 방향을 잃고, 몸속의 혈관계와 림프계와 세포들은 속도를 잃고 있다. 호흡과 생각이 멈추어 서고, 초속으로 내닫던 삶의 궤적에서 일탈한 몸은 차츰 시간이 멈춘 정물이 되어간다.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선이 폴리스라인을 넘어 차도의 끝, 가장 낮은 곳을 향해 가는 중이다. 그의 삶도 이미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것이다. 경찰관이 수신호를 보낸다. 교차로를 건너려면 피할 수 없이 그 선을 밟아야 한다. 건널 수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경찰관이 빨리 지나가라고 붉은 지시봉을 흔든다. 브레이크를 밟은 채, 멀미를 한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시간이 한없이 늘어져 무한한 고통 속에 멈춰있다.

쏜살같이 달아나는 시간이 있는가하면, 이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시간도 있다. 시간에 대한 감각은 개인의 정서에 따라 변한다. 다분히 심리적이며 주관적이다. 어느 순간에든 인간이 단순하게 하나의 감정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긴 세월 후에도 문득 그 시간으로 돌아가곤 한다.

어렸을 때는 인간의 시간이 각자 따로 흐르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누군가의 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다른 이의 시간은 짧더라도, 둘이 공유하는 시각은 같은 지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슈퍼컴퓨터가 단체로 와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그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시간에 대한 감각은 종잡을 수 없었다. 누구나 어린아이였을 때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놀이시간이 순식간에 끝날 때면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빠르게 달아난다고들 한다. 누가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하루가, 일 년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죽음의 신 타나토스까지도 속여 넘겼던 시시포스가 훔쳐간다 해도, 이토록 감쪽같을 수가 없다. 그런데 시간의 속도를 따라잡기가 힘들다고 느끼는 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그에 대한 연구는 꽤 다양하다.

심리학자 퍼거스 크레이크(Fergus I. M. Craik)는 나이를 먹으면 생체시계가 느려져 외부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노화와 시간 판단’에 관한 실험에 의하면 시간을 세도록 하는 실험에서 노인 그룹은 30초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서야 30초가 흘렀다고 답했고, 시간의 경과를 짐작하도록 했을 땐 120초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40초밖에 안 됐다고 판단했다.

피터 멩건(Peter A. Mangan)도 20대에서 60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마음속으로 측정한 시간이 차이가 있음을 확인했고, 이런 착각이 나이에 비례해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밝혔다.

중뇌의 선조체(striatum)에 위치한 돌기신경세포(spiny neuron)의 활성에 관여하는 도파민은 나이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데, 선조체 회로의 진동을 빠르게 한다는 것이다. 내 안의 기준이 빠르면 상대적으로 바깥세상이 천천히 돈다고 느낀다. 나이를 먹으면 뇌 안의 도파민 활성이 떨어지고, 자신의 시계가 느려지는 만큼 세월이 빠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젊은 시절처럼 시간을 따라잡지 못하고 놓쳐버리는 일은 많지만 보상도 있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최근의 기억들은 잊어도, 오래된 기억이 매우 선명하게 다시 떠오른다고 한다. 비로소 오래전의 자신을 되찾고, 누릴 여유가 생기는 걸까? 혹은 아름다운 여생을 준비하도록 정리할 시간을 주는 걸까?

미국의 심리학자 허드슨 호글런드(H.Hoagland)는 체온이 인지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추측으로 실험을 시작했고, 사람의 체온이 올라갈수록 시간을 인지하는 과정의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체온은 시간을 더 길거나 짧게 느끼도록 하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유기적으로 시간감각에 관여한다. 그러니, 어느 정도 선택과 조율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미국 베일러 의과대학의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David Eagleman) 박사는 경험 속에서 느끼는 시간의 변화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에서, 강렬한 자극에 의한 경험은 일상적인 경험보다 훨씬 촘촘하게 기억되므로 오랫동안 지속된 경험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린 시절에는 쌓이는 기억의 양이 월등히 많기 때문에 시간이 훨씬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낀다고 한다. 따라서, 정신이나 신체의 활동을 활발하게 한다면 놓치고 있는 시간을 다시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인데 95세의 나이에도 하루에 여섯 시간씩 연습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기자에게, 자신의 연주 실력이 아직도 조금씩 향상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첼로를 연주할 수 없을 정도의 부상과 질병 등 거듭되는 고난에도 일생동안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발견과 성장을 거듭한 카잘스의 시간은 누구보다 길었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잊혔던 인물과 사건들이 재조명되고, 재해석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요즘의 사회 분위기를 보면 시간은 매우 유연한 힘을 갖고 있다. 시간을, 놓쳤던 속도를 되찾으려는 노력은 결과와 관계없이 그 자체가 가치이다. 꽃은 열매를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도 섭섭해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속도를 지키며 진다.

서서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다. 미칠 듯 속도를 올렸던 심장박동이 차츰 가라앉는다. 지나가고 싶지는 않지만 모두가 가야할 뿐이라서, 내 뒤에 늘어선 사람들 또한 피하지 못해 기다리고 있는 길이다. 때가 이르면 우리가 놓친 그 속도 위를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의 바퀴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지나가야만 한다. 그래야 세상 역시 제 속도를 잃지 않을 테니까.

액셀러레이터를 조심스럽게 밟는다. 지금이 그의 순서일 뿐인, 누군가가 놓친 속도 위로 피할 수 없는 속도를 붙인다. 아직은 ‘여기’ 남아있는 속도를.

백윤경  imbue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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